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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자료]/해파랑길(770km)

[해파랑길]제37,38,39코스(안인해변-허균,허난설현기념관) 트레킹후기---2018년 12월 2일(일)


[해파랑길] 37,38,39코스 트레킹후기

 

트레킹일자 : 2018년 12월 2일(일)

■ 출발장소 : [부산도시철도] 12월 1일(토) 서면역7번출구 "19:00"

■ 트레킹코스 : 안인해변→염전해변→청량마을→강릉항→송정해변→강문해변→허균,허난설현(허균여동생)기념관...내륙으로 설정된 구간을 해변으로 변경 시행 합니다.

■ 트레킹시간 : 약 20.7km, 약 4시간50분 소요


허균(許筠, 1569~1618)

   허균은 총명했고 문재(丈才)가 있었다. 부형(父兄)과 자제(子弟)들이 모두 높은 벼슬살이를 하며 유명했지만 그는 행동을 단속하지 않고 어머니의 상중에도 고기를 먹고 기생을 끼고 놀았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서 좋은 벼슬을 얻지 못했다. 드디어 도교 · 불교의 서책을 두루 읽고서 스스로 얻은 바가 있다고 말했는데 더욱이 이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나중에는 원흉(元凶)과 줄이 닿아 벼슬이 참찬에 이르렀지만 끝내 대역을 피해서 죽음을 당했다. 그 사람의 일은 입에 올리기에도 더럽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요, 윤기(倫紀)의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을 일등으로 높였으나 나는 하늘을 따르지,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않겠노라.”
그들 무리가 이 말을 외며 지극한 이론이라고 했으니 이단 · 사설의 극치였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수호전》을 지은 사람은 3대에 걸쳐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그 응보를 받는다고 했다. 도둑들이 그 책을 읽으며 우러렀다.

허균 · 박엽 등이 그 책을 좋아해 책에 나오는 도둑들의 이름을 따서 서로 부르며 어우러졌다. 허균은 또한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 그들 무리인 서양갑 · 심우영 등이 몸소 그들 행동을 답습하여 한 마을이 시끄러웠다.

허균 또한 모반을 피하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귀머거리 · 벙어리가 되는 갚음보다 훨씬 심했다.

 허균과 그의 일파인 김윤황 · 하인준 · 현응민 · 우경방 등은 모반을 일으킨 죄명으로 서문의 사형장에서 처형했다. 이때 허균의 나이 쉰 살이었다.


■ 허난설헌   

    문장가문에서 성장해 어릴 때에 오빠 허봉과 동생 허균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균에게 시를 가르쳤던 이달(李達)에게 한시 수업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安東) 김씨(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했으나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기녀들과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비극이 연속됐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며 불우하게 살다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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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범어사역7번출구)에 도착하여 "만원의 행복"의 시간으로 오늘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