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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자료]/산행후기

[익산] 미륵산(430m) 및 미륵사지 산행후기---2019년 5월 26일(일)


백제 숨결 간직한 서동요 탄생지 익산

[익산] 미륵산(430m), 미륵사지 산행후기

 

산행일자 : 2019년 5월 26일(일)---[부산]유앤미산악회

출발장소 : [부산도시철도]서면역7번출구 "07:00"---부산관광고속

       (차량진행방향 :서면역7번출구→가야우체국→백양터널입구→백양터널 매표소→구남역4번출구) 

산행코스 : 아리랑고개미륵산성우재봉미륵산(430m)사자암미륵사지익산박물관(주차장)익산박물관(관광)

산행시간 : 5.0km, 약 3시간예상

산행개요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 기록은 미륵사 인근 오금산에 마를 캐며 홀어머니는 못의 과 성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은 글 끝에 "삼국사기에서는 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그렇다면 법왕(法王)이 왕자시절 미륵산에 드나들면서 서동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여 낳은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 된다.

마동(서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하는 서동설화와 미륵사 창건설화로 되어 있다.

선화공주 와 결혼한 후 왕이 된 마동(무왕, 백제30대왕, 600-641)이 왕비와 용화산(현재의 미륵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연못 속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는데 미륵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익산미륵사지석탑(益山彌勒寺址石塔)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미륵사 서쪽 절터에 있으며,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석탑의 시원형식으로 불리며, 한국 석탑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진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붕괴를 막기 위해 시멘트로 보수한 이후, 1999년 국가문화재위원회가 해체보수정비를 결정했다.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 보수 정비를 시작해, 18년만인 20193월 정비 완료되었다.

미륵산(彌勒山 430.1m)은 익산의 주산으로 원래 용화산으로 불리었으나 미륵사에 인연하여 미륵산이 되었다. 남방에 만경강(萬頃江)을 거느리고 있고 북방에는 금강(錦江)이 흐르는 익산평야의 주산을 이루고 있으며 동으로는 천호산(天壺山) 줄기를 두르고 운장산(雲長山) 등 노령산맥(蘆嶺山脈)과 연결된다.

미륵이나 용화는 모두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는 이름으로 후조선의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마한이라 이름 하였고, 성을 쌓아 기준성(미륵산성)이라 하였다.

미륵산성은 정상인 우제봉에서 동쪽 계곡을 둘러쌓은 성터를 비롯, 미륵사터, 사자암, 왕궁탑등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Click 하시면 큰 지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 복원에 대하여]

미륵사가 동방 석탑 중 최고라는 이름은 헛소리가 아니다. 100년 전에 벼락이 떨어져 그 절반이 허물어졌다.”

---와유록(臥遊錄 1756)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639)때 지어진 후 1300여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제 모습을 상당 부분 잃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모습은 191012월 일본인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이다. 당시에도 이미 동탑은 자취를 잃었고, 서탑은 6층까지만 남은 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한 모습이었다.
일제는 1915년 콘크리트 185t을 투입해 붕괴된 석탑의 벽면을 응급 보수했다. 하지만 8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콘크리트로 뒤엉킨 석탑은 흉물이 돼버렸다. 결국 1999년 문화재위원회는 전격적으로 석탑의 해체 후 보수정비를 결정했다.
문제는 석탑의 원형을 어떻게 설정할지였다. 창건 당시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을 알려주는 문헌이나 그림 등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1993년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처럼 9층으로 쌓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그러나 동탑은 20세기 한국 문화재 복원 역사상 최악의 사례로 꼽힐 만큼 실패작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동탑의 원형을 추정할 기록이 없으니 서탑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고, 기계로 석재를 가공해 문화재가 주는 특유의 색감도 살리질 못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익산 미륵사지 보수정비 기본원칙]

1. 추론에 의한 복원을 지양하고, 남아있던 6층까지만 보수해 진정성을 확보한다.

2.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훼손된 부재(部材·탑의 재료)는 과학적 방법으로 보강해 최대한 재사용한다.

3. 전통기법만으로 원형 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는 최소한으로 현대적 기술을 적용한다.

4. 조사, 연구, 시공 등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미륵사지 석탑은 다소 불완전해 보이는 6층의 형태로 돌아왔다. 김 학예연구사는 “3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미륵사지 서탑과 동탑의 비대칭적인 모습은 한국 문화재 수리 역사와 가치관의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극명한 사례라며 미륵사지 석탑 복원은 추론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는 문화재 보존의 보편적 이념을 충실히 구현했다고 말했다.





































부산(서면)에 도착하여 촉촉한 돼지수육과 소근소근 담소로 오늘을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