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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자료]/산행후기

[함안] 아라가야 역사 순례길 트레킹후기---2021년 6월 20일(일)

[함안] 아라가야 역사 순례길 트레킹후기

▩ 트레킹일자 : 2021년 6월 20일(일)

▩ 출발장소 : [부산도시철도] 괴정역1번출구  "09:00 ---- 승합차 이용

▩ 트레킹코스 : 함안시외버스터미널→쌈지공원→가야시장→성진맨션→함안천→동산정→대사교→함안역→무진정입구→성산산성(함안산성)→백산마을→백산마을회관→도동마을→함안박물관→말이산→관동제방→관동교→가야교→남문마을→연꽃테마파크→함안공설운동장→함주공원→함주교→함안시외버스터미널

▩ 소요시간 : 총 7구간 약 17.6㎞, 약 5시간30분 예상

▩ 개 요

   아라가야 역사 순례길은 고대 삼국시대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 등의 6가야 중 아라가야(함안)의 역사와 이야기 거리를 찾아 떠나는 도보여행길이다.​

아라가야 역사 순례길은 총 7개 구간으로 17.6㎞에 6시간 30분이 소요되는 길이지만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고대 유적지부터 현대의 시가지까지 걸어볼 수 있으며 탁월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걷기 길이지만, 표고가 낮아서 쉽게 걸을 수 있으며 정자와 연못, 산성과 고분, 시장과 공원 등 역사도시 함안의 다채롭고 활기찬 풍경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길이다.

말이산은 "머리+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우두머리의 산" 즉 "왕의 무덤이 있는 산"을 의미합니다.

경남 함안군은 탁월한 경관을 조망하면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고대 유적지부터 현대의 시가지까지 걸어볼 수 있는 ‘아라가야 역사 순례길’ 조성을 2021년 3월에 완료하였다.
‘아라가야 역사 순례길은 총 7구간(17.6km), 51개의 이정표로 연결된 코스로 정자와 연못, 시장과 공원 등 역사도시 함안의 다채롭고 활기찬 풍경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걷기 길이다.
7개로 구성된 각 구간은 저마다의 테마를 지니고 있는데, 전통 5일장이 열리는 가야시장과 옛 폐선부지였던 도심재생지인 아라길을 지나는 1구간(1.4km, 25분)이 시가지 코스에 해당된다.
시내를 벗어나 동산정까지 이어지는 2구간(2km, 35분)을 지나 함안천을 따라 함안역을 찾아가는 3구간(2.2km, 40분)부터가 본격적인 순례길의 시작이다.

순례길은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무진정과 성산산성에 오르는 4구간(2.6km, 55분), 함안박물관까지 자박자박 걸어 내려오며 숨을 고르는 5구간(2.2km, 40분 ), 아라가야 문화유산의 결정체이자 순례길의 하이라이트인 함안말이산고분군을 품은 6구간(3.7km, 70분), 마지막으로 남문외고분군과 연꽃테마파크를 거쳐 출발지로 회귀하는 7구간(3.5km, 60분)까지를 역사테마 코스로 볼 수 있다.
산성과 고분을 포함한 코스도 대체로 완만해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으며, 구간 중간에 식사, 관람 등으로 휴식을 취해가면서 걸을 경우 평균적으로 6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가야(加耶)에 관한 자료

고령가야,성산가야,대가야,소가야,아라가야,금관가야가 있다.

가라,가량·가락이라고도 한다.

기원 전후 시기에 경상도 해안지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여러 정치세력들이 소국 단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3세기경 상호연맹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변한소국 연맹체가 성립되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구야국을 중심으로 김해,낙동강하구,경상남도 해안일대에 분포했다.

친신라와 친백제 세력이 공존했는데, 5세기 초 고구려가 백제계를 정벌함으로써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신라에 예속되었다.
후기 가야연맹은 구심점이 경상도 내륙지역이었으며 고령지역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보다 진전된 통합력과 정치력을 발휘했다. 신라와 제휴하여 가야연맹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6세기 초 백제에게 패배한 후 급격히 쇠퇴했다. 소국들이 잇따라 신라에 복속되었고 562년 신라에 의한 대가야국 정벌로 멸망했다.

 

한때 가야사는 4세기 후반 무렵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이를 식민지배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로 왜곡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축적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억설을 극복하고, 현재 가야사 자체의 독자적 발전과정이 체계화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가야사는 대체로 5세기 후반을 경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김해지역의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후기는 고령지역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의미한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경상도 해안지역의 여러 집단들도 일정한 정치세력으로 결집되어 소국(小國) 단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이들 소국들은 동일한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3세기경에 이르면 상호연맹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들은 변한(弁韓)으로 총칭되었다.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은 수로왕이 김해지역의 9간(九干)을 통합하여 건설한 구야국이었다.

그러나 가야제국의 연맹관계는 백제국(佰濟國)을 중심으로 통합된 백제나 사로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간 신라에 비하면 지극히 느슨한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부분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경제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다.

전기 가야연맹의 분포 범위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구 및 경상남도 해안 일대의 소국들에 국한되며, 내륙지역에는 아직 가야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해상교통의 요지에 위치할 뿐 아니라 풍부한 철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낙랑과 왜를 잇는 해상교역의 중개지로 발달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교역거점들은 일찍부터 중국의 선진문물이 밀려들어와서 소국 단위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고, 각기 독자적인 교역권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는 대외적으로 신라·백제·왜 등의 이웃 집권국가들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가야 소국들이 각기 강력한 독자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 우세세력에 의한 일원적인 통합이 어려웠고 다원적이고도 완만한 연맹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고성·사천·마산·동래 등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서 김해에 못지않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면모를 반영한다. 이와 같은 정치적·문화적 특징으로 전기 가야연맹은 집권적 통합력을 진전시켜간 이웃 신라·백제 등의 도전에 직면하여 재빨리 대처하는 민첩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4세기에 이르러 교역상대국이자 후원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면서 주변의 세력판도가 일변하자, 이러한 가야의 취약성은 현실적인 문제로 나타났다.

고구려는 반도에서의 경쟁국인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를 적극 후원했고, 이에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북중국의 문물을 도입하여 바다 건너 왜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교역 중심지인 가야지역을 잠식해갔다.

백제는 왜와 연결하여 이를 견제하면서 역시 가야지역에 친백제세력을 만들어갔다. 이로 인해 가야연맹의 여러 소국은 다시 친신라세력과 친백제세력으로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가야 중심지역이 친신라를 표방하였고, 탁순국(卓淳國:지금의 창원)을 중심으로 한 가야 서부의 여러 세력은 친백제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5세기초 고구려 광개토왕의 가야지역 백제계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토(征討)가 진행되면서 가야의 여러 세력은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신라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어가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5세기 이후 가야의 구심점은 서서히 낙동강 서안의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후진적이던 내륙지역은 전화(戰禍)를 거의 입지 않았고, 해안지역의 선진세력들이 이주해 풍부한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고령지역의 반파국(伴跛國)은 집권적 정치세력이 대두하여 가야지역의 새로운 맹주국으로 부상했다. 흔히 이를 후기 가야연맹 혹은 대가야연맹이라 부른다.

후기 가야연맹은 반파국을 중심으로 하여 보다 진전된 통합력을 발휘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5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중국 남조의 제(齊)에 사신을 파견하고 삼국관계에 강력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백제·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고, 백제·왜와 더불어 신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6세기초에는 백제와의 국경지역인 기문(己汶:지금의 임실)지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일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기문 전투에서 패배하여 왜와의 교역중심지인 대사(帶沙:지금의 하동)지역마저 백제에게 빼앗겨 대왜교역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그후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신라와 제휴하여 가야연맹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기 가야연맹을 구성한 소국들이 잇따라 신라에 완전 복속되어 562년(진흥왕 23)에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 의한 대가야 정벌로 소멸하였다.